1. 수운 최제우가 남긴 동학의 불씨를 살리고 키우고 불을 지켰다.
2. 동학혁명 당시 남북접 이 대립하여 주전(전쟁하기를 주장)이냐 화전(싸움을 끝맺기 위해 화합함)이냐로 갈렸을 때 간부들의 뜻을 받들어 주전론을 수용하면서 동학군은 혼연일체가 되어 척왜양과 보국안민의 혁명전에 나서게 되었다.
3.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교도와 민중들을 집결하고, 이것은 군주체제의 금제선을 뛰어넘어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 민중운동으로 진화되고, 현대 시민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요악: 1871년 이필제의 영해 봉기 - 탄압 강화 1883 동경대전 간행. 교세 확대. 전라도 경기도 지역 인식 개선. 1892년 교조신원운동. 척왜척양

35년 은신생활 (72세 처형)
소박하게 살아가는 민초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지내게 됨. 욕심이 없고 너그러우며 인자한 성자의 기품을 지님. 근검정직하여 그의 성정과 훈도는 그를 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강화시킴. 종교인이면서 사회개혁가。 혁명가。
태백산백 소백산백 오지 마을 200여 곳 옮겨다니며 산골마을 주민들 상대로 포교
사인여천 - 사람은 하늘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로서 귀천을 분별함은 곧 천의에 어기는 것이니 제군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선사의 뜻을 이어 가기를 맹세하라
세상의 모든 사람, 천한 사람이나 귀한 사람 모두 한울님 같이 대하고 섬겨야 한다.
경천 경인 경물의 삼경 사상으로 구체화
동학의 동은 지정학적 대칭 용어가 아닌 우리나라 고대의 국호에서 기원.
동방에 있는 나라. 동국 (요하 경계 만리의 국가) 동이
동국여지승람 동국명산기 동국문헌 동국문헌비고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리지 동국통감 등
한의학을 동의. 동의보감
동학은 민족사상이고 민족 종교
동학 창도 초기: 도인들의 각성기
중기: 교조신원운동과 교세 확장
후기: 동학농민혁명
사도난정: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동학으로 바꾸고 세상을 어지접혔다는 뜻의 죄목
국내의 개혁요구와 세계사적인 변혁의 사조에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다가 강제 개항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반식민지화
국내 봉건적 관료층의 수탈로 신음하는 민중의 해방운동
<포덕문>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영일정씨 슬하에서 자라다가 15세 때 아버지 사망. 계모가 떠나고 누이동생과 함께 먼 친척집에서 성장. 경북 영일군 신광면 터일(기일동)
17세 한지를 만드는 조지소에 근무. 기술 배움. 2년. 세상 물정 터득.
19세 흥해 밀양손씨와 결혼
임익서: 누이동생 출가.
임익서 최시형과 함께 동학에 입도.
최제우의 시신을 경주 용담정까지 운구하여 장례 치름.
집강. (면장이나 이장에 해당)
검곡: 화전민 마을. 1980년때까지도 화전을 일구었던 흔적 남아 있음. 화전민(이동식 농업)으로 살았음. 서른
가진 땅 한 평 없이, 가진 재산도 없이. 가장 소외받는 하층민의 삶.
세상은 곧 천지개별할 것이라는 풍문.
최제우가 득도하여 1861년 6월부터 포교 시작. 선비들과 백성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11월 지방 유생들이 그를 서학쟁이로 몰아 발고하면서 관으로부터 탄압이 따르자, 호남 지방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으로 은거.
이때 <논학문><수덕문> 지음.
1862년 7월 호남을 떠나 경주부 청송으로 돌아와서 백사길과 박여대의 집에 머무름. 관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포교활동 어려움.
최시형은 경주 용담정으로 최제우를 찾아감.
"그대가 한울님 말씀을 들은 시간은 내가 수덕문을 읊던 시간이니 나의 글 읊는 소리가 그대의 귀에 영감으로 들린 것이 분명하다."
1863년 7월 23일 최제우는 40-50명의 도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시형을 북도중주인(경주 북부 지방의 포교 채임자)로 임명
경주 남쪽은 최제우가 직접 관할하고 북쪽은 최시형이 분담하여 관할. 1861년 최제우로부터 직접 동학의 가르침을 전해 받고 입도했다는 설. <도원기서><수운행록> 등 최시형이 이미 1862년 3월 이전부터 동학에서 활동.
스승과 제자 23명 체포. 박씨부인과 맏아들 세정까지 포박.
경주부에 끌려감.
옥바라지 비용을 모으는 등 대책 서두름.
최제우는 현풍 출신 동학도 곽덕원을 대구 감영의 하인으로 분장시켜 최제우에게 식사를 올리도록 했다.
유시
등불이 밝아 물 위에 아무러한 혐극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시문편>
의미: 조정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혐의를 잡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는 그들의 손에 죽겠지만 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심문관들은 경상감사 서헌순의 명의로 조정에 장계(검찰 기소장) 올림. 사설을 퍼뜨려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이유
최시형에게 멀리 피신하라고 유언을 남긴 채 참살 당함.
1862년 2월 진주민란 시작으로 임술민란 전국 각지에서 발생.
1863년 흥선대원군 섭정 - 노론 소론 남인 북인(사색)을 신분 계급 출생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등용. 부패관리 적발 및 파직. 서원 47개만 남겨놓고 모두 철폐. 세제 개혁. <대전회통> 법률제도 확립.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정권과 군권 분리.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원납전을 발생하여 민새 ㅇ어렵게 만들었음. 천주교 탄압.
1864년 11월 경기 충청 황해 3도에서 화적떼가 민가 약탈
1866년 병인양요 . 쇄국정책
1868년 8월 정덕기 '정도령' 난을 일으켜 사형
1871년 신미양요 / 동학도 이필제 경상도 영행에서 교조신원운동 600여 명. 영해봉기. 관아를 공격하고 부사를 처형하는 등 깃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서울에서 능지처참.
제너럴셔먼호 사건, 남연군묘 도굴 사건, 정감록
1872년 강수 전성문 등 지도급 인사 5명과 갈래산(태백산)의 적조암에 들어가 49일 기도
해월신사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확정하기 위하여 '도적' 및 '경전'을 대대적으로 판각하여 간행하고자 결행을 한 것.
경전. 설법집을 비롯하여 많은 자료를 압수하여 불태움.
동학 교리의 체계화, 동학 조직의 재건과 지역적 기반의 확대, 경전의 집성, 제도아 의식의 확립, 정기적 수련 제도의 실시를 통한 지도자 양성
<동경대전> 최제우가 짓고 최시형이 간행.
1879년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 집에 경전 간행소 설치. 1년만 1880년 6월 14일 발간. 최제우의 글을 모은 문집.
핵심은 <포덕문><수덕문><논학문>
포덕이란 동학의 출현. 하느님의 큰 덕을 일반에 널리 알린다.
논학문은 동학의 본질 밝히기.
수덕문은 도를 닦는 방법 설명
쌀 한줌 흙 한 줌 돌 한 개라도 소중하게 다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조화에 합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역시 전레 없는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들을 미워하지 말고, 저들의 물건을 박대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하늘을 모신 사람이요, 그들의 물건도 하느님의 조화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까.
박해. 동학을 적대시. 관헌을 풀어 동학도 닥치는대로 검거. '주자학의 이단세력'
영양의 일월산 기슭 용화동 마을에 은거. 매일 짚신 두 켤레 삼았음. 최보따리라는 별명. 언제라도 피신할 수 있도록 집신 한 켤레와 바 한 깨를 넣은 봇집을 옆에 둠.
은신처를 마련하고 은밀해 각지에 사람을 보내, 흩어진 도인들을 불러 ㅁ왔다.
두집살림 - 최제우 식구 보살핌
최시형은 동학을 이끌면서 기본을 '사람 섬기기'에 두었다.
1881년 6월 단양군 남면 천동리 여군덕의 집에 간행소 차리고 목판본으로 간행. <용담유사>간행. <검결> 삭제
<검결>(1861) 칼노래 남원 은자암에서 수도를 할 때 득도의 기쁨으로 이 검결을 짓고 목검을 들고 춤을 춤.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
1884년 10월 교단의 직제인 육임제 마련.
과거제 페단: 수구기득권층 자제들의 '입도선매'로 독점. 몰락한 양반이나 평민들에게 유일한 출세의 사다리인 과거가 특정계층이 독점하면서 조선 왕조는 백성들은 물론 지식층으로부터 극심한 이반(민심이 떠나서 배반) 현상 불러옴.
1890년 1891년 손병희 손병흠 등 제자들과 순방
1892년 10월 공주 충청감사 상대 교조신원운동
2차 삼례에서 전라감사 상대
충북 청주 솔뫼 손천민 접주 집에 도소 설치.
도차주 강수,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임규호 서인주 서병학 황하일 조재벽 장세원
교죠신원운동: 종교 차원에서 사회변혁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
서인주 서병학 등이 충청관찰사 조병식과 전라관찰사 이경직에게 <입의문> 보냄
격문을 통해 11월 11일 삼례역에 모일 것을 공지
<정감록> 예언 서남쪽으로부터 대변혁이 있으리라.
무속의 씻김굿, 증산교의 해원사상 - 원한 풀어줌으로써 혼령을 하늘나라에 으리게 한다.
1892년 11월 1일 충청도 삼례 민중집회 (가을걷이가 끝난 뒤) 1만 여 명
포교의 자유. 동학의 합법성 쟁취. 만인평등 시천주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임손천민을 상소 대표자로 삼아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게 청원. 서리와 포졸들이 선량한 도인들을 탄압 살상하는 비인도성을 규탄하는 내용
조병식과 이경직은 동학의 공인은 정부가 결정할 일이나 부당한 탄압은 없애겠다고 약속. 지도부는 이 약속을 믿고 평화적으로 군중 해산.
동학운동 사상 최초의 정치 집회
서인주 서병학 급진파/ 최시형 김연국 손천민 온건파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서 대규모 집회를 통해 교조신원을 직접 정부에 건의 / 왕세자 탄신일 별시 진행 /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처럼 차림
50여 명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림
고종 전교 - 소원에 따라 베풀어주리라. 해산했지만 조정은 약속과는 달리 동학을 더욱 거세게 탄압. 체포.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
1887년 아펜젤러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설립 9월 언더우드 최초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장로교) 설립
1893년 3월 10일 충북 옥천 창성면 거포리의 김연국 집에서 수운 순도기념 제례를 지내면서 거사 준비. 동학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다. <척왜양창의> 즉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는 것이 정의라는 명제 채택.
<통유문> 보냄
2만 여 명 보은에 집결. 보름 동안 농성 유지.
어윤중을 선무사로 보내어 동학지도부와 타협하도록 함. (병력이 모자랐고 청국의 파병요청이 무산)
정부 측과 타협의 결과 농사철이어서 도인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탐관오리의 대표급으로 동학 측에서 지목한 감사 조병식과 영장 윤영기 등이 처벌됨.
동학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협상할 만큼 종교적인 결집력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기에 이르렀음.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은 500년 동안 유지된 조선의 주자학 중심의 군신, 반상(양반과 상민) 체제라는 봉건의 낡은 철문을 닫고 근대의 광장을 여는 신호등 역할을 했다.
내유신령: 처음에 세상에 태어날 때 갓난아기의 마음
외유기화: 포태(아기나 새끼를 뱀)할 때 이치와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루는 것
삼경론:하늘, 사람, 자연 섬기기를 똑같이 하라. 1872년 1월 5일 소백산의 깊은 골짜끼에서 49일 기도 <대인접물> 법설에서 시작.
최시형이 말하는 한울(하늘)은 초월적인 대상이 아니라 내재적인 자신의 심중에 모시는 신령의 종자
경물은 자연생태계를 하늘의 모습으로 공경하는 것.
사인여천: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
인간의 존업성에 대한 각성
민본 사상
계급타파 사상
여성의 지위 각성
우리나라에는 두가지 병폐가 있는데, 하나는 적서의 구별이요, 다음은 반상의 구별이다. 적서의 구별은 집안을 망치는 근본이 되고, 반상의 구별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 되니,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고질이라는 것이다.
최준식 <개벽시대를 여는 사람들>
손병희 인내천으로 승계 사람이 곧 하늘.
19세기 말 조선은 외세의 침법과 정치의 부패, 사회지도층의 타락과 국교인 유학의 쇠락으로 나라가 위기로 치닫고 있었음.
말세론 미륵불 출현설, 각종 예언과 도참설이 나돌았다
정감록과 민간신앙의 말세구원론과 메시아 신앙이 불안한 백성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지방관들의 탐학과 거듭되는 흉년, 1876년 개항 이후 양곡이 일본을 밀반출되면서 백성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임.
민생의 안정이 곧 나라의 근본 (민유방본)
조선시대 소원제도 <경국대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은 당상관에게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억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리하고서도 원억이 있으면 신문고를 두드린다.
지방관-사헌부-국왕(신문고)
상언: 억울한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 시에 꾕과리나 북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임금에게 직소하는 방법
복합상소 제도: 대궐 앞엥서 엎드려 호소
세도 정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소원제도는 유명무실
보은집회 해산 -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충청 전라도 도어사)로 임명
칙유문 역시 소원제도의 본질에 역행
동학은 살아서 보국안민과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현세주의 종교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서양 각국은 조선을 무기력한 먹잇감을 놓고 각축을 벌임.
1876년 6월 일본 제일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9월 부산 두모포에 세관을 설치
1882년 7월 제물포조약 부산 원산 인천 개항 사방 50리 상업활동 범위 확장, 2년 뒤 100리로 확대
일본 공사관 보호 명분으로 일본군이 서울에 상주.
1881년 61세 손병희 여동생과 재혼.
1893 보은에서 귀향할 무렵 호남의 도인과 농민 1만여 명이 전라도 전주부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별도의 집회를 열었음.
전봉준, 서장옥, 황하일 등
조선 제일의 쌀농사지대인 고부 지방에서는 개항 뒤 쌀 수출이 늘어나면서 지주들이 소작농민들을 더욱 수탈.
조선 후기부터 왕실 소유의 토지인 궁방전이 몰려 있어 이를 관리하는 감관의 농간으로 농미들은 큰 고통을 겪음.
조세 운반을 맡은 전운사 조필영이나 균전을 경영하려고 중앙에서 파견된 균전사 등도 제못대로 세금을 거두어 정부에 대한 농미들의 반감 샀음
민란. 생존권 투쟁.
한 밑천을 뽑아 벼슬길을 트려고 광분.
자기들 마음대로 온갖 명목을 다 붙여 세금을 뜯어 갈 뿐만 아니라 효자 열녀 충신을 표창 기념하는 사업을 한다고 그 돈까지 물리는 가 하면, 수령 아전 군졸들이 이중삼중으로 착취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사교를 믿는다고 매질을 하고 돈을 받은 후에 내보냈다.
위나 아래나 모든 관리가 다 도둑이요 강도였다.
백성들은 착취에 견디다 못해 집과 땅을 팔고 떠났지만 그들 역시 떼 지어 사람을 해치는 도둑으로 몰려 능룍당하기 일쑤.
동학은 한국사상. 보국안민의 민족 민중주체 의식. 포덕천하 광제창생 척왜척양 후천개벽
천도교에서는 31혁명 후 <개벽>이란 제호의 종합지를 창간하여 72호까지 내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
고부군 옛부터 땅이 기름지고 관개시설이 잘 돼 있어 부촌으로 인식.중앙권력의 든든한 뒷배가 있어야만 고부군수 자리를 차지. 자주 군수 교체되고 임기를 채우고 떠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원자가 많아서 1년에 군수가 몇 차례 바뀜 180년동안 133명 군수. 재임기간이 1년 반 정도.
1894년 9월 18일 최시형은 각 포의 두령들에게 충청도 보은의 청산으로 모이라는 동원령 내림. <초유문> 발령
하늘의 뜻 이르렀음을 지적. 북접이 남접의 동학군과 합세하여 무력항쟁에 나설 것 명령.
동학혁명은 남북접이 함께 봉기하는 계기가 됨. 전경주의 포를 선봉, 정규석 포를 후군, 이종훈 포를 좌익, 이용구 포를 우익, 손병희를 종군통령으로 임명. 총지휘. 손병희는 북접군의 총사령관 10만 명 지휘
북접 교단은 농민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어디까찌나 종교적 차원에서 농민 봉기를 묶어 두려 함.
북접 교단지도부가 대체로 최하 빈농층보다는 부농과 중농의 입장을 반영
북접의 보은 집회
전봉준 주도 원평 집회
1894년 3월 21일 고창군 무장의 당산마을 앞 들판에서 동학논ㅇ민군의 본격적인 봉기 시작.
80일 만.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하고 동원된 혁명적 집결. 백산에서 황토현으로 집결지 옮기면서 동학도인과 농민이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혁명의 진행은 급물살을 타게 됨
고부관아 점거의 주동 인물로 전봉준 등이 지목되어 조정에까지 보고. 그들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됨. 농민군을 지휘하게 될 '호남창의대장소' 조직
김덕명 오지영 총참모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움. 동학 조직을 통해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집결. 동학의 포가 있는 지역은 각자 지역별로 봉기하여 소속 창의대장소로 모여들었음.
3월 21일을 봉기일로 정한 것은 이날이 최시형의 탄신일. 8000명
9월 중순부터 10월 주순까지 북접 산하의 동학농민군은 경기도 지방 대부분을 석권하고 보은으로 집결
논산에 동학농ㄴ민군의 대본영이 설치되고 전봉준과 손병희가 만남.
일본군은 3개 연대 8000여 명 병력. 잘 훈련되고 신식 무기로 무장.
조선정부군과 지방의 영병 또는 일본 대륙낭인들의 저옵 지원을 받으면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상
영국에서 개발되어 수입한 스나이더 소총.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 1874년 일본의 대만 침략 때 사용.
화력은 250대 1 수준
동학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대규모 접전을 벌인 곳은 공주 우금치전투.
손병희 무대는 순창에서 공동 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를 향하여 북상
12월 24일 기해 잔여 부대 해산. 최시형 이하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등 각기 개별행동
동학군 2만 군사가 500명으로 줄어들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음
1500만 명도 안 되는 인구에서 20-30만 명 동학군이 학살
폐정개혁에서 반외세 투쟁으로 전환
정신력은 강했지만 전투력은 취약했다
일본군은 동학군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정보원과 밀정일 전국 각처에 파견. 다수의 밀정들은 약장수로 변장하거나 관광객으로 가장시켜 현지에 투입.
일본 낭인패와 밀정 군사들이 수집한 각종 정보는 주한 일본영사관을 통해 즉각 일본정부에 보고. 일본 정부의 치밀한 작전
난징기념관
<일본 우익과 정계요인은 왜 난징학살을 부인하려 하는가> 논문
난징대학살은 그 규모면에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학살을 능가한 것. 일본군은 중국의 수도 에서 6주 동안 30여만 명을 도살하고 대량의 가옥을 파괴했으며 10여만 명의 부녀자를 유린하고 차고와 재물을 약탈.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잔홍핵위다.
일본은 동학군의 학살에 대해 대부분 부인하거나 축소 왜곡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지휘 명령하여 학살한 동학농민군은 대체로 20-30만 명
척왜 이유: 일본의 약탈적인 양곡무역. 쌀의 일본 유출로 인한 물가의 앙등. 1889년 조일통어장정 이후 일본어선의 남획으로 우리 어족자원의 고갈. 임오군병 갑신정변과 관련한 정부의 거액 배상금 지불 등 대부분 농민의 조세 부담
일본 상인들이 조선 농촌에 침투하여 쌀 콩 등 매점하여 일본으로 실어감
심한 식량난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상품의 조선 진출은 급속도로 증가. 상권 장악.
1889년 식량난 해결하기 위해 곡물수출금지령 내림. 방곡령. 일본 상인들 큰 타격.
방곡령이 해제되고 일본에 배상금까지 지불하면서 일본 상인들의 매점매석은 더욱 기승. 농민들의 생활고 더욱 어려워짐.
일본 상인들은 매년 다량의 농산물, 쌀 대두 소 쇠가죽 인삼 면화 등 약탈
1887년 후반기부터 1882년 전반까지 5년간 평균 농산물의 대일 수출액은 약 61만 엔
1891-1893년 약 789만 엔으로 늘어남
전국적으로 가뭄이 거듭되면서 사방에 도적떼가 횡행
무장한 화적들이 노략질 일삼음.
전국 곳곳에 화적이 없는 곳이 드물었음.
동학이 구원의 메시아로 다가옴
신분제와 이중삼중으로 얽힌 수탈 구조
집강소: 민정 기관
동학농민군이 통치의 중심.
집강 - 기강을 잡는 민간조직체. 1860 구례 향류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농민의 정치를 실행했다.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실
집강소 운영에 참여하면서 신바람이 났다.
관민합작 우리나라 최초 농민자치기구
프랑ㅇ스형경 후 1871년 빠리꼼뮌에 비해 13년 뒤의 일 세계사적인 변혁운동
외적에는 한없이 무력한 정부가 동족에게는 가없이 잔혹
일본군의 포악무도한 살상행위로 동학군이 패퇴. 거액의 현상금과 감투에 눈이 먼 동족의 밀고.
동지의 배신으로 일본군이나 관군 검거
김개남은 붙잡혀 서울로 압송 도중에 살해
전봉준 ㄴ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은 일본군이 주도하는 허울 뿐인 재판 끝에 피살
동학혁명으로 도망갔던 각지의 수령 방백들은 다시 복귀


참고
- 김삼웅. 해월 최시형 평전. 미디어샘. 2023.
- 최동희. <민중의 메시아 해월 최시형>
- <최선생문집도원기서>
- 윤석산 <해월신사의 생애와 리더십>
- 윤석산 <초기 동학의 역사>
- <해월신사법설>
- 오지영 <동학사>
- 이이화, <인물 한국사>
- 표영삼 <동학의 발자취>
-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 장일순 <시에 대하여>
- <취어>
- <일본왜교문서>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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