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1일 개원했다. 방문자센터, 박물관, 추모관, 카페테리아, 캠핑장. 카페테리아에는 녹두라떼, 파랑새에이드를 맛볼 수 있다.

5월 11일은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가 있었던 날이다. 511버스가 지나간다. (광주 518버스는 광주518민주묘지를 지나간다)
2019년에 5월 11일을 동학농민기념일로 지정했다. 매년 5월 11일 기념식이 열린다.


울림의 기둥
2차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화했다. 흰 기둥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역을 상징한다. 흰 기둥은 농민들이 입었던 베옷을 상징한다.
총 90개 정도다. (실제 120여 개 고을에서 일본에 맞선 봉기가 일어났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없다. 당시 청일전쟁이 발발해서 기록이 없고, 전쟁 중이라 봉기가 일어날 환경이 안 됐다. 하늘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이다. 전라도에서만 한정된 봉기가 아니었다. 민란과 차별화 되는 점. 민란은 고을을 넘지 못했지만, 사발통문, 무장포고문, 백산대회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을을 뛰어넘었다.

남원 - 1861년 12월부터 1862년 6월까지 수운 최제우가 남원 은적암에 기거하면서 <논학문> 등 집필. 처음으로 '동학'을 사용.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시지. 시천주. 사람이 곧 한울님. 후천개벽.
최제우는 계집종 한 명을 해방시켜 며느리로 삼고,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다. 수운은 경주 용담에서 포덕. 1861년 유생들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가 '서학'으로 몰기 시작. 1860년에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을 하고 포덕 시작. 동학은 유불도를 통합 1864년 3월 대구 관덕정에서 참형 당한다. 참형 당할 때 동경대전, 용담유사 불 태웠다. 그 당시 동학은 경상도로 국한되는 지엽적 활동으로 보고 천주교 만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3000명 정도)동학금지령이 내려진다. 좌도난정(거짓된 도로 정도 어지럽힌다)
포접제 - 동학 교단 조직제도. 1862년 12월 최제우가 최초로 접주 임명. 접은 30~50가호 묶음.
포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만듦. 접 보다 상위 개념. 포는 접 10~20개 관리, 포 지도자를 대접주라 불렀다. (김개남이 대접주로 있었던 포에는 24개 접이 있었다.) 1891년 전라도에는 16개 포가 있었다.
1892년부터 수차례에 걸친 교조신원운동이라고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해달라는 운동이 벌어졌다. 전국적인 농민동원의 경험이 축적되었다. 광화문 복합상소라고 고종에게 상소를 올림. 실패했다.
집강소 - 1차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집강소 활동을 중요하게 여김.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12개 폐정개혁안에 합의했는데, 폐정개혁안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민의 민에 의한 민을 위한 정치를 실현. 전라도 내 안정과 치안 유지. 집강소가 설치 되지 않는 지역이 두 곳이 나주와 남원. 양반과 유림의 세력이 센 곳이었다. (나주목사 민종렬, 나주감옥) 관민상화(관과 민이 서로 돕는다) 원칙. 민정자치기관. 농민들이 직접 통치.
서울 종로 - 전봉준 장군은 12월 2일 순창 피노리에서 잡힌다.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주막에서 잡혔다. 현상금이 많이 걸렸었다. 담을 뛰어 넘으려다가 다리를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 일본군이 서울로 압송하여 심문하겠다고 했다. 밀고자 김경천을 세상의 눈총이 무서워 숨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상금 1천 냥을 받아 나누어가졌다. 나주 감옥을 거쳐 서울 전옥서(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했다.(영풍문고 자리) 임시 재판소(권설재판소) 설치해 여섯 차례 심문을 받았다.(전봉준 공초, 죄인 심문 기록)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원래는 역적죄는 참형을 당했다. 3월 29일 판결이 내려지고 1895년 3월 30일 전봉준, 최경선, 손화중, 성두한, 김덕명 같은 날 처형되었다. 일본의 꼼수가 있었다. 개정된 법에 의하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 4월 1일부터 시행.
김개남은 전주에서 효수되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게 하여 거리에 조리돌려졌다.



불멸-바람길
2022년 6월 25일 가천대 임영선 교수. 그 전에는 친일조각가 김경승 '전봉준 선생상' 있었다. 하늘에서 보면 사람 인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1차와 2차 봉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의 깃발은 보국안민, 오른쪽은 척왜양창의. 1차 봉기는 전주성으로 2차 봉기는 한양으로 향하고 있다.
전통소 칡소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멸종위기로 지정되었지만 2007년 국립축산과학원에서 인공 번식에 성공해서 3천마리 정도 복원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 소 연간 12,000마리 수탈했다. 부산 우암동(소바위마을) 소막마을에서 소를 검역했다. (김제평야의 쌀 수탈, 부산 감만포구를 통해 소 수탈) 우리나라 소 70%를 수탈했다. 소막이 19개(소 60마리 수용)가 있었다. 625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임시 피난처로 사용되었다.
서세동점(서양이 동양으로 밀려오다) - 농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대적 경제적 국제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2차 아편전쟁(1856-1860)으로 베이징이 서양 연합국(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에 의해 함락되었다. 서양의 신식무기로 중국적 질서가 깨졌다. 1868년 일본 메이지 유신. 1875 운양호 1876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농업과 수공업 기반이 무너졌다.
혁명인 이유: 혁명은 민중이 기존의 사회정치경제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일으키는 대규모 운동이다. 아래로부터 일어난다. 이상과 가치가 중심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타파,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가치를 표방했다. 쿠데타는 위로부터 소수 엘리트나 군인이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말하고 정당성이 부족하다. 동학농민군이 원했던 나라는?
삼정의 문란, 몰락 양반층 (술장사, 돗자리 장사) 농민공동체가 붕괴되었다. 매관매직.
헌법 전문 읽어보셨나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31운동과 419의 뿌리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정읍시와 전국 39개 동학농민혁명 단체들은 동학농민혁명 명칭과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기 위해 국회에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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